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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

공포단편 번역

by 글문어말슴 2021. 2. 15.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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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는 눈부신 금발 머리칼을 가진 소녀였습니다.

 

카나리아는 금빛 이파리가 넘실대는 사시나무 가지 높은 곳에 앉아서 지나가는 마차를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카나리아는 조그만 병정들처럼 멀리까지 줄지어 선 집들을 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카나리아는 오솔길에서 찾은 예쁜 나뭇잎과 매끄러운 조약돌로 주머닐 채우는 것을 좋아했지만, 집에서는 화를 내는 카나리아의 부모님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모님들은 언제나 카나리아가 묻혀 오는 흙과 뜯어진 드레스의 솔기를 두고 그녀를 야단쳤지만, 카나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카나리아는 이른 아침의 안개 낀 쌀쌀한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때 세상에는 그녀와 연한 낯의 해님뿐이었습니다. 헌슬릿 지역축제의 포스터가 브라운스톤으로 지은 약제상과 푸줏간을 따라 나붙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포스터를 지나치며 이따금 가까운 빵집 굴뚝에서 솟는 가느다란 연기를 보았습니다. 카나리아가 사는 리즈에서는 먼지와 강철과 빗물의 냄새가 났습니다물론 빵집의 냄새를 빼면 말입니다.

 

카나리아는 거무튀튀한 철제 천장과 쩌렁쩌렁 울어대는 기계의 소음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반보우 거리를 따라 있던 헌슬릿 지역축제와 포도주 광고들은 모두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흰 종잇조각들만 얼룩처럼 남겨졌습니다. 그 대신 브라운스톤 벽을 가로질러 나붙은 것은 그녀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라고 강조된 인물화였습니다. 굴뚝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솟아올랐지만, 빵집이 아닌 공장에서였습니다.

 

카나리아는 다른 수천 명의 여자들이 복닥거리는 곳에 가만히 선 채로 몇 시간이나 보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친 다리가 후들거리고, 발에는 물집이 잡혀도 카나리아는 자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카나리아는 천장까지 줄지어 쌓아 올린 번쩍이는 금속 포탄의 수를 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카나리아는 코르다이트와 화약으로 빈 카트리지를 채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카나리아는 먼지와 강철과 빗물 대신 그녀의 손가락에서 나는 니트로글리세린의 단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카나리아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것은, 시들고 누르스름한 빛으로 변해버린 그녀의 살갗과 머리칼과 눈동자였습니다.

 

오래 TNT에 노출된 사람들은 황달과 간독성 증세를 일으켜, 언제나 무기력하고 메스꺼웠습니다.

 

빗나간 스파크가 도화선을 점화시켰을 때, 카나리아가 기뻐한 것은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몰랐습니다. 태양처럼 눈부신 화염이 타오르고, 그 열기가 카나리아의 아픔을 씻어내렸습니다.

 

카나리아는 싸늘하고 누르스름한 살갗을 가진 소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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